시편 103: 동태복수법 vs. 용서

시편 103: 동태복수법 vs. 용서

10절: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14절: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동태복수법’의 가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성 밖의 신 야훼는 다른 가치를 내세운다. 야훼는 그의 백성의 잘못을 그대로 갚지 않는다. 인간과 신들의 접촉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울 때, 야훼와 인간의 관계는 부드럽다. 인간이 신들을 달래야 할 때, 야훼는 인간을 품는다. 인간과 신들 사이에 용서는 없다. 그러나 야훼와 인간 사이에는 용서가 뚜렷하게 작동한다. 신들과 인간 사이에 동태복수법이 작동하니까 그 질서 위에 실존하는 인간들 사이에도 그 법은 그대로 작동한다. 동태복수법의 신들은 야훼를 이해하지 못한다. 야훼가 그들의 질서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야훼 대 신들의 대립은 본질적이다.

야훼와 인간 사이에 용서가 작동하는 이유가 14절에 드러난다. 야훼는 사람이 티끌임을 안다. 야훼는 티끌들 사이에 가동되는 동태복수법을 당장 멈추라고 명령한다. 야훼가 성 밖에 거주해야 하는 존재들의 신이 되어주었기에 그분은 그들 사이에서 티끌의 티끌이 존재하는 것을 혐오한다. 그것은 야훼와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부드러운 소통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태복수법의 신들과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들 사이에는 비록 면도칼처럼 날이 서 있으나 그 수미일관함 때문에 용서보다 이질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시인은 야훼가 신들과의 대결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미리 찬양한다. 시인은 용서가 동태복수법을 끝내 이길 것을 미리 축하한다. 시인은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태양이 황량한 들판을 걸어가는 사람의 외투를 벗길 수 있음을 알기에 미리 기뻐한다. 죄가 사망을 낳듯이 용서가 구원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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