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동, 바울의 기도, 기독교사상 14(1970)
이것은 논문이 아니라 한태동 목사의 설교문(고후 12:7-9)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교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을 기도에서 찾은 후 기도가 그리스도인에게 위로와 용기와 평안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영향도 끼치는 면을 들추었다. 기도의 부정적 영향은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갖가지 추태로 드러났다. 기도하면 안 되는 일이 되고, 기도하면 초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오해는 그리스도인의 추악한 얼굴이었다. 기도를 오해한 것에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왜곡된 인간 마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포착한 설교자는 기도의 본질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성찰하여 제대로 기도하자고 촉구한다. 올바로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설교자는 바울의 기도와 예수의 기도를 올바른 기도의 사례로 제시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울의 기도 내용보다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서 올바른 기도가 무엇인지는 드러난다. 바울은 자기 몸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차례 기도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였다. 바울의 가시는 그가 사람으로서 겪는 아픔이 아닌가? 그걸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면 안 되는가? 치유가 기도와 그 응답의 사례인 경우는 성서에 많지 않은가? 아픔의 지속이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는가?
여기에 기도의 대전제가 등장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한다. 그분의 응답은 그것이 병이 낫는 등의 문제 해소일 경우도 있고, 문제 상황이 그대로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바울의 경우는 가시의 존속이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였다. 하나님은 기도자에게 최선(최고)의 상황을 베푸신다. 이것을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이 신앙이다. 기도는 사람이 자신의 실존 상황을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이해하려는 몸부림이다. 설교자는 이에 대한 적절한 사례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를 제시한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 잔을 치워주소서. 이것은 바울이 제 몸의 가시를 제거해달라는 기도와 같다. 바울과 예수는 사람이기에 한계와 연약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둘의 다른 면은 그다음부터다. 바울은 다시 한 번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청했고, 예수는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가시가 제거되지 않는 것과 십자가를 피할 길이 없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은혜라는 사실을 수용하려는 자기 제어가 기도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이유이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그 상황이 하나님의 뜻과 은혜임을 고백하려는 몸부림이 기도다. 그런 기도자는 몸의 가시가 제거되어도 되지 않아도 기어이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고백하고야 만다.
설교자는 기도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서자고, 나에 대한 하나님 은혜가 족하니 이기고 살 수 있음을 믿자고 촉구한다. 기도한다고 가시는 제거되지 않는다. 물론 가시가 제거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시가 그대로든 제거되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신다는 데 있지, 기도를 통한 하나님 동원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