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9: 죽음 이후, 없다? 있다?

15절: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 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돈을 매개로 공존한다. 돈 말고 다른 가치로 부자와 가난한 자를 평가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돈이 그들을 나누는 기준은 매우 현실적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각각 두 가지 면으로 나뉜다. 돈을 좇는 부자와 좇지 않는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살든,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죽는다. 죽음이 인간의 유한성을 대표한다. 죽음은 경계선 아니면 끝이다. 어떤 이에게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그 이후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죽음 이후가 없다면, 현재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세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죽음 이후의 차원이 없다면, 현재의 윤리적이고 가치 있는 삶은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으면, 하나님의 존재도 의미 없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돈을 좇느냐 좇지 않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 문제와 연결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돈의 가치에 매여 현재를 살 수 없다. 물론 현실에서 돈이 하나님을 이기는 경우가 잦다. 인간이 유한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현재와 인간 생명의 죽음 이후도 관장한다.

그런데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존재 문제는 신앙의 영역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하면, 신앙의 차원은 인간의 고유한 가치이고 위대한 면이다. 포이어바흐(L. Feuerbach)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이는 인간을 분석하면 신의 존재를 추상할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의 프로젝션(projection)의 결과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간에 의해 ‘요청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대상화 하여 요청하는 인간의 사유 능력이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 이 차원을 들여다보면, 신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사들 가운데 하나다.

시편 49편의 시인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기준보다, 즉 죽음이라는 기준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기준으로 현재를 살아가라고 독자에게 당부한다. 시인이 삶의 기준으로 제시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현재도 인간 생명의 죽음 이후도 여전하다. 죽음 이후의 차원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누구보다 돈을 좇으며 살면 그만이다. 죽음 이후의 차원이 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산다. 여기서 인간의 한계이자 대단함은 다시 드러난다. 그 인간은 죽음 이후를 믿지만 하나님 없이도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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