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6: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하다.

10절: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인 줄 알아라. 세상 만민이 나를 높이 받들어 섬기리라.

성서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주는 것을 가장 불쾌해하고 역설적으로는 무서워한다. 성서는 한편으로는 나(하나님)와 너(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돌이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해서 ‘하나님 만세’를 부르게 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너희의 찬양이 필요 없다고 하면서도 그 찬송을 바란다. 이런 모습은 사실 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람의 수준에서 이해한 ‘신화’와 다를 바 없다. 신화에서 신은 사람의 성정을 지닌 능력자 아니던가. 어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의 사랑과 칭송을 바라는 부분을 ‘하나님의 인격성’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성서를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성’으로 보는 이해다.

시편 46편에서 하나님은 바다, 땅, 그리고 사람(민족)을 다스린다. 그런 분이 시인의 피난처다. 시인은 피난처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느꼈다. 사람의 일생에서 피난처 경험 시간이 많겠는가, 그렇지 않은 시간 경험이 많겠는가?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지 않은 시간이 더 많다. 피난처 시간만 떼내어 하나님 찬양화 한다면 다른 경험의 시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시간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시인과 한편이 아닌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든 사람이 추상했든, 이런 문제에 대한 최종적 처리장이 ‘지옥’ 아닌가. 사실 지옥이 하나님의 처분 결과도 되겠으나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무능력의 개념이기도 하다. 자칫 당신의 피조물이 지옥에 가는 프로세스를 막아서지 못하는 하나님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자기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 증명을 하게 만들지 말자. 우리의 최선은 이 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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