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2 : 용서 이후 회개 - 용서의 보편성
5절 :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주님께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거역한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님께서는 나의 죄악을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시편 32편은 회개 이후 용서를 제시한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을 때, 뼈가 녹아내리 듯 삶의 고통이 심했다. 그가 입을 열어 생각나는 모든 죄를 토해 내자 그에게 주님의 용서가 임했다. 다윗은 재갈을 물려야만 잡아둘 수 있는 말이나 노새처럼 굴지 말라고 당부한다(9절). 한마디로 회개가 빠를수록 삶도 편해진다는 거다. 이것은 다윗의 생생한 경험이기에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식이기도 하다.
회개 후 용서 공식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공수표 회개를 처리하는 전문가가 된다. 회개의 무한 반복, 즉 회개라는 공수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회개의 미련한 것을 통해 용서한다.
용서 이후 회개 공식도 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용서가 사람에게 돌입해 올 때, 그러니까 하나님의 용서가 사람의 의식과 의지와 상관 없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나의 잘못을 감싸 안아 덮는다고 느껴질 때, 회개가 발생한다. 이 때의 용서는 무조건적 은혜이고, 회개는 감사의 한 종류가 된다. 물론 사람의 인식은 지속성이 없기에 감사의 회개도 연속성이 없다.
그렇다면 다윗은 시편 32편을 회개 후 용서의 구도에서 노래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회개의 감사로서 찬송했는가?
회개 후 용서는 쉽다. 이 구조는 사람의 이해 구조에 익숙하다. 이 구도가 원인과 결과, 인과 관계에 잘 맞기 때문이다. 용서 후 회개는 사람이 용서를 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잘 안 보인다. 하나님이 선제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용서했다는 선언 앞에서 갑자기 멍해지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감사다. 여러 가지 감사 가운데 회개가 있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삶만 보이고, 그것만이 가슴에 가득 차 있으니 용서보다 회개가 더 크게 보인다. 우리는 자칫 시편 32편을 회개하고 용서 받은 다윗의 찬송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다윗의 예가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없음도 사실이다. 시편 32편의 찬송이 내 것이 아닌 사람, 그래서 가슴 벅차게 따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실재한다. 그는 회개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요구받기도 하는데, 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회개의 보편성보다 용서의 보편성을 내세우고, 차라리 회개를 여러 감사 표시 중 하나로 보는 것이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