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1 : 다윗의 하나님 신뢰의 근거
23절 : 나 환란 중에서 '주님 눈 밖에 났구나.' 생각했으나 당신께 부르짖었을 때 내 기도 소리를 들어주셨사옵니다.
내가 국민학교 졸업할 무렵인가 중학교 1학년 쯤 어느 겨울에 ‘냉동 권사’라는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집회를 했다. 그분이 죽어서 냉동실까지 갔는데 살아났다 해서 냉동 권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그분이 간증을 다 마치고 강단을 내려가다 팍 쓰러졌다. 예배당에 ‘아이고, 주여’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나도 그때 눈물 콧물 흘려가며 회개하고 소위 은혜 엄청 받았다. 애가 뭔 죄가 그리도 많았는지. 시간이 지나서 냉동 권사가 사기꾼임이 드러났다. 나는 TV에서 그분을 다시 만났다. 그분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거짓말이어도 은혜만 잘 받더라.” 이것은 내가 간증을 인정하지만 달갑게 여기지 않게 된 결정적 한 마디가 됐다.
간증의 뼈대는 실패와 좌절-기도와 다짐-회복-경험의 보편화 추구이다. 간증자의 체험이 청중을 크게 울릴수록 성공한 간증이 된다. 시편 31편도 다윗의 간증 집회다. 좀 더 넓히면 시편 대부분이 다윗의 간증 집회다. 이번에도 다윗은 고통이 춤이 되는 경험을 했다. 다윗의 신세 한탄을 듣고 어떤 이는 다윗의 처량함에 공감각한다. 다윗에게 자신을 포갠 그는 다윗의 회복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렇게 그는 경험의 보편화를 꾀했다.
다윗은 ‘주님의 눈 밖에 난 사람’이 되어 바닥을 기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는데, 그 하나님이 사람에게 눈길조차 안 주셨을리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 아니 모든 피조물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신 것,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아니던가.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 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시라, 저 사람에게 빵을 주시라’ 기도하지 말자고 강조했다. 하나님이 눈이 없는 게 아니라 기도자가 눈이 없고, 하나님이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기도자가 빵 살 돈(마음)이 없는 것 아니냐는 거다. 기도하면서 왜 하나님을 눈 없고 돈 없는 분으로 만들다가, 또 어떤 때는 돈 없는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기도하냐는 거다. 다윗이 주님의 눈 밖에 난 사람이라고 느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다윗을 그리고 다윗에게 해코지 하는 그들 조차도 눈 밖에 내지 않았다.
간증의 구성 요소 또는 프로세스를 통과(?)한 다윗은 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한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내라고 한다. 하지만 다윗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의 현실-살려달라는 간구-하나님의 응답이라는 프로세스를 근거 삼지 않은 것 같다. 이 프로세스의 적중 확률은 예상 밖에 낮다. 주위를 둘러보라. 낮은 확률이 보다 현실적이지 않은가. 오히려 ‘하나님은 다윗을 눈 밖에 내놓은 적이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윗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내라며 격려하는 이유요 근거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다. 살려달라는 간구를 들어주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되고, 그 간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낯부끄러워 어쩌는가. 기왕이면 다윗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