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 용서-실천 규범 이전의 예수의 약속

 18절: 가난한 사람, 아주 잊혀지지 아니하고 억눌린 자의 희망, 영영 헛되지 아니하리라.


시편 9편의 악상 기호는 뭇랍벤(muth labben)이다. 이 시편은 아들이 죽었을 때의 심정에 튜닝 돼야 한다. 그만큼 다윗의 상황과 심정이 절박하고 암울하다. 다윗이 실제 이 악상 기호를 붙였을까? 내가 아는 다윗은 이 악상 기호 대신에 정반대의 기호를 붙였을 것 같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내용은 어두운데, 화면이나 리듬은 경쾌하다. 영화는 그래서 더 슬프다. 다윗이 이 정도를 모르지 않았을텐데.

어쨌든 다윗의 현 상황과 기대가 가장 잘 드러나 보이는 곳은 18절이다. 영어 성서(CEV)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The poor and the homeless won't always be forgotten and without hope.” 다윗이 기도 한 줄로 자기 상황과 소망을 다 표현했다. 이 구절로써 다윗은 하나님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는 하나님의 한쪽 손목에는 곤궁한 자기 상황의 수갑을, 다른 손목은 하나님의 처분과 기대의 수갑을 채웠다. 하나님은 다윗이 채운 수갑을 어떻게 풀 것인가?

다윗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상(모습)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목에 이런 수갑을 채울 수 있게 했다. 다윗의 믿음은 히브리서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평가한 것과 같다. 외아들 이삭을 죽이더라도, 아니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신과 아들을 둘 다 죽일지라도 다시 살려낼 것을 믿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이 잊혀진 존재, 그래서 희망이 사라진 존재가 아님을 확신했다. 그의 강력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다윗처럼 수갑을 채우셨는데, 그분은 당신의 손목에 채우셨다. 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읽노라면, 그것이 내게 더는 윤리적 행위 지침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선언, 곧 산상복음으로서 다가온다.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윤리적 실천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나를 자비롭게 대하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이다. ‘용서하라’는 말씀은 도덕 원칙과 규정이 아니라, 용서하겠다는 예수님의 굳은 약속이다.

이러한 하나님 모습(믿음)은 다윗의 가슴에 어떻게 박혔을까? 하나님 체험은 다윗의 심장에 잔잔하게 자주 그려지고 새겨졌다. 큰 것 한 방이 아니라, 소박한 여러 번의 하나님 경험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동행이라 하겠다. 평소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하며 살고, 용서도 받아본 사람이 용서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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