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편: 다윗이 부른 찬송의 파워
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편의 악상기호는 깃딧이다. 갓 지방에서 유래한 악기여서 붙은 기호다. 나는 깃딧이 guitar로 들려서 기왕이면 기타 치며 부르는 찬양이라 부르고 싶다.
어쨌든 두 아이가 서로 아빠 자랑을 한다. 한 아이는 자기 아빠는 공부도 잘 해서 어느 대학에서 공부 했고, 지금은 큰 회사 사장이라고 자랑한다. 반면에 다른 녀석은 나는 이것도 해봤고, 저것도 해봤으며, 어디 어디를 가봤는데, 이 모든 걸 아빠랑 같이 했다면서 자랑했다. 시편 8편을 노래하는 다윗은 어느 아이인가?
다윗이 부르는 찬양의 특징은 이 두 아이의 차이에서 두드러진다. 앞의 아이는 아빠와의 경험이 별로 없으나, 뒤의 아이는 아빠와 한몸이다. 다윗이 어릴 때부터 한 일이 목동 일이다. 다윗이야말로 선한 목자였기에, 양들이 섞여 있어도 척 보면 다 구분했고, 다들 비슷하게 생긴 양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고,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양과 이름을 매칭할 수 있었고, 사나운 짐승이 양에게 달려들 때는 목숨을 걸고 싸웠고, 푸른 풀밭으로 양들을 이끌었으며, 양들이 목 마를새라 물을 찾았다.
이제 시각을 바꾸어, 다윗이 양이라면,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볼까? 지금 씹고 있는 풀, 저 앞에 보이는 물,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목자이신 하나님이 양인 다윗을 위해 마련해준 것들이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 끝에 ‘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하며 감격하지 않겠는가.
다윗이 부른 찬양시가 신약에도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네.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네.’(요 3:16) 다윗의 시간 이후의 신약은 사람을 세상으로 확대했다. 그 옛날 요한복음을 작성한 이(공동체)의 생각의 폭은 참으로 넓었다. 요즘 교회는 자신과 세상을 구분하느라 정신 없다. 다윗 시절보다 뇌가 쭈그러든 거다. 어쨌든 다윗의 찬양이 파워가 있고, 깊이가 있는 것은 그의 경험에서 터져나온 찬송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