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 다윗도 살고 구시도 살고

17절: 나는 주님의 의로우심을 찬송하고 가장 높으신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련다.


다윗이 베냐민 출신의 구시의 말을 듣고 속상해서 기도한다. 다윗의 생각은 단순 명료하다. 그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논리를 노래한다. 악한 사람에게 악한 결과가, 선한 사람에게 선한 열매가 주어진다는 거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논리를 하나님의 의로우심까지 확대한다. 하나님이 선한 사람의 손을 들어줄 것이 분명하고, 선한 편은 다윗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윗의 기도에 이심전심 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좋은 것이고 은혜다.

그러나 다윗의 논리가 바로 우리의 논리요 상황이라고 맞장구 친다 하여 ‘나는 주님의 의로우심과 그분 이름을 찬송하고 싶다’는 다윗의 마지막 기도에서 멈추면 안 된다. 우리는 카타르시스에 너무 취하다가 자칫 다윗의 옳고 그름의 논리에 하나님을 가둘 수 있다. 하나님 입장에서 다윗과 구시를 바라보자. 누구 한 사람 벌 주거나 손 들어주고 끝날 사안이 아니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은 사탄과 협의도 하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탄에게 모든 이가 의인이라고 하는 욥을 내어주지 않는가. 게다가 하나님이 선한 사람의 손만 재깍재깍 들어주셨다면, 실존하는 현재의 나는 존재할 수 있겠는가. 사실상 이것들은 다윗의 옳고 그름의 논리로는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일 아닌가.

하나님은 다윗은 다윗 대로, 구시는 구시 대로 챙겨야 한다. 예수는 이런 사안에서 구시를 어떻게 챙겼냐면,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자기들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하시며 자신을 죽이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여기서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받도록 판결한 사람, 실제 집행하는 사람, 침 뱉고 험한 말하며 조롱하는 사람, 이도저도 싫어서 도망친 사람만 용서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쉽게 생각하자. 그들 뒤에 누가 있는가? 어떨 땐 하나님이 사탄도 부린다고 했다가, 어떨 땐 사탄을 하나님과 쌍벽을 이루는 철천지 원수로 만들면서 머리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하나님이 사탄을 용서하신다 하여 거기에다 대고 ‘하나님, 그럴 줄 몰랐다’ 볼멘소리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한 것 아니겠나. 만일 다윗이 구시도 살고 자신도 살려는 마음을 담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구했다면, 그의 기도는 성서에 들어올 수 있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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