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 기도는 아브라카다브라가 아닙니다.
1절: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기도를 잘해서 시편까지 남긴 다윗에게도 기도는 만만찮았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존재를 느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했더니 숨어 계신 하나님을 경험한다. 1절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다윗의 엄살이 아니라 그의 기도 타율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안타나 홈런을 칠 때, 다윗은 타석에 나갔다가 덕아웃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다윗이 볼넷 출루라도 자주 했다면, 그가 ‘멀리 계신 하나님’이라는 볼멘소리로 기도를 시작하겠는가. 기도가 ‘아브라카다브라’라면 기도 안 할 사람이 있겠는가. 타율이 형편 없고 이론과 실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다윗의 기도에서 ‘나도 그런데’ 라고 공감각한다면, 기도를 다시 규정하자. 기도에 내 소원이 안 들어갈 수는 없겠으나, 기도가 적어도 ‘아브라카다브라’는 아님을 인정하자. 예수라도 상황 모면과 난국 타개를 위해 ‘아브라카다브라’로 기도할 때면 하늘은 자신을 숨겼다. 그런데 누구라서 하늘이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주셔야 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