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5장: 가벼운 노래와 무거운 은혜
출애굽기 15장: 가벼운 노래와 무거운 은혜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 (출애굽기 15:21, 새번역)
"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어,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흘 동안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였다." (출애굽기 15:22, 새번역)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그에게 나무 한 그루를 보여 주셨다. 그가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단 물이 되었다. 주님께서 그 곳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다." (출애굽기 15:25, 새번역)
저자는 승리의 소고 소리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타는 듯한 갈증의 신음 소리를 곧바로 이어 붙입니다. 21절의 환희와 22절의 절망 사이에는 고작 '사흘 길'이라는 짧은 시차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 냉정한 배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홍해의 기적은 이스라엘의 '상황'을 바꾸었을 뿐,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의 내면을 단번에 성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다를 가른 그 거대한 기적조차 인간의 뿌리 깊은 불신과 변덕을 완전히 씻어내기엔 역부족이었음을 저자는 담담히 폭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하나님의 '무거움(Glory)'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크고 무겁습니다. 반면, 그 무거운 은혜를 담아내야 할 인간이라는 그릇은 너무나 얇고 가볍습니다. 사흘 전 춤추며 찬양하던 입술이 마라의 쓴 물 앞에서 순식간에 원망을 쏟아내는 이 표변함은, 구원이 인간의 자격이나 의지에 달려 있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홍해를 건널 힘도 없거니와, 내 인생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꿀 능력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주어(Subject)는 철저히 바뀌어야 합니다. 나를 주어로 삼을 때 광야는 불평과 두려움의 장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어가 되실 때, 광야는 비로소 은혜의 학교가 됩니다. 백성들이 원망을 쏟아내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 이미 한 나무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손을 잡을 힘조차 없어 비틀거릴 때, 그 연약한 손을 놓지 않고 붙드시는 분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뿐입니다. 이 전적인 무능력의 자각 위에서야 비로소 참된 은혜(Sola Gratia)가 빛을 발합니다.
주목할 점은 기적 직후 저자가 보여주는 조급함입니다. 하나님은 물을 달게 하신 직후,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급하게 "법도와 율례"를 정하십니다(25절). 시내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저자는 허겁지겁 말씀을 끌어옵니다. 왜일까요? 그는 알았습니다. 당장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기적보다 더 시급한 것은, 변덕스러운 인간의 가벼움을 묶어둘 단단한 말씀의 구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을 "치료하는 주님(여호와 라파)"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은 고장 난 우리의 내면을 고치시는 분입니다. 그 치료의 처방전은 다름 아닌 그분의 말씀입니다. 기적에 취해 언제든 다시 흔들릴 수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안전한 닻을 내리십니다. 무거운 기적과 가벼운 존재 사이, 그 위태로운 간극을 메우는 것은 결국 매일의 순종뿐임을 광야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자가 오고오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