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4장: 무거운 고집과 더 무거운 영광, 그 치열한 섭리
출애굽기 14장: 무거운 고집과 더 무거운 영광, 그 치열한 섭리
"그러면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막막한 광야에 갇혀서 아직 이 땅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출애굽기 14:3, 새번역)
"주님께서 이집트의 왕 바로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시니, 바로가, 주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뒤쫓았다." (출애굽기 14:8, 새번역)
"내가 이집트 사람의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겠다.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병거와 기병들을 전멸시켜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물리치고서 나의 영광을 드러낼 때에, 이집트 사람은 비로소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14:17-18, 새번역)
저자는 하나님을 얼마만큼 신뢰하는 것일까요? 그의 신뢰는 출애굽기 전체에 맥박처럼 뛰고 있지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14장에서 가장 뾰족하게 드러납니다. 파라오가 한 사람의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토록 고집불통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뿐 아니라 이집트 전역의 맏이들을 잃은 장례가 갓 끝난 시점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할퀴고 간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병거를 몰고 추격에 나서는 파라오의 광기는 단순히 인간의 복수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현실적 강퍅함입니다.
출애굽기의 편집자는 이 불가해한 상황을 인간의 심리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와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비겁한 변명(고르반)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모순과 악조차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맹목적으로 보일 만큼 강력하고 치열한 유일신 신앙의 고백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사탄조차 하나님의 허락 하에 움직이듯, 파라오라는 거대한 악 역시 하나님의 길고 깊은 숨 안에서는 영광을 위한 조연에 불과함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의 심오한 언어유희를 마주합니다. 마음이 무겁다(고집스럽다)는 뜻의 카베드(Kabed)는 하나님의 영광(Kavod)과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짓눌러 고집스럽게 하심으로써 역설적으로 당신의 더 무거운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의 무게는 심판의 맷돌이 되지만, 언약 백성에게 그 무게는 삶을 지탱하는 구원의 닻이 됩니다. 깃털처럼 가볍디 가벼운 이스라엘의 원망과 파라오의 무거운 살기가 충돌하는 홍해 앞, 그 혼돈조차 하나님의 완벽한 통제 아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극한의 연출을 하시는 걸까요? 18절은 그 이유를 "이집트 사람은 비로소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당신을 몰라주면 병이 나는 신의 인정 욕구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곧 죽음이기에 물벽을 세우고 병거를 수장시키는 격렬한 방식을 통해서라도 참 실재를 마주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초월적 자비라 할 것입니다.
편집자는 홍해의 거센 바람 속에서, 혹은 훗날 엘리야가 들었던 세미한 소리 속에서 동일한 고백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보라, 이 모든 소란과 침묵의 주인이 누구인가." 우리의 좁은 신정론적 질문을 훌쩍 뛰어넘어 악의 시도조차 당신의 영광으로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그 무거운 손길만이 오직 우리의 신뢰할 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