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2장: 얇고 딱딱한 생사의 경계, 그리고 애곡을 삼킨 식탁

출애굽기 12장: 얇고 딱딱한 생사의 경계, 그리고 애곡을 삼킨 식탁

"그 날 밤에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면서 지켜 주셨으므로, 그 밤은 '주님의 밤'이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밤새워 지켜야 하는 밤이 되었다." (출애굽기 12:42, 새번역)

이야기의 절정인 열 번째 재앙이 임박한 시점, 출애굽기 저자는 긴박하게 흐르던 서사를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는 장황하게 유월절 규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문학적 흐름을 방해하는 듯한 이 서술 방식은 저자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집트가 무너지는 스펙터클한 사건이 아니라, 그 구원을 대대로 기억하게 할 예식(Liturgy)이었습니다. 기적은 한 번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예식은 기억을 붙들어 영원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2절)로 삼으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제국의 농사 절기나 왕의 통치력에 의존하던 삶을 끊어내고, 이제부터는 구원의 사건을 기준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시간을 살겠다는 시간 주권의 회복 선언입니다. 그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는 무교병과 어린 양입니다.

유월절, 그 밤은 이중적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해방과 자유와 구원의 절기인 반면, 담장 너머 이집트에게는 통곡과 죽음의 날이었습니다. 생(生)과 사(死)가 유월절이라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딱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집을 건너뛰시는(Pass over) 그 밤의 양면성은 급하게 구워 부풀지 않은 무교병처럼 얇고 딱딱합니다. 구원은 낭만이 아닙니다. 누룩(죄와 옛 습관)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단호하게 씹어 삼켜야 하는 비장한 결단이며, 타자의 죽음을 담보로 얻은 서늘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42절은 이 밤을 '주님의 밤'이라 부릅니다. 주님께서 뜬눈으로 밤을 새워 우리를 지키셨기에, 이제 우리도 뜬눈으로 깨어 그 은혜를 지켜야 한다는 상호적인 깨어있음의 언약이 이 구절에 서려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유월절의 무교병 속에는 여전히 환호와 애곡이 위태롭게 공존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피를 보고 방향을 틀었을 뿐 재앙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살았으나, 누군가는 죽어야 했던 미완의 밤이었습니다.

이 오래된 긴장은 골고다 언덕,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월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소됩니다. 그 밤 예수님은 유월절에 서려 있던 슬픔과 심판, 그 모든 애곡의 요인들을 홀로 껴안으셨습니다. 첫 번째 유월절이 재앙을 피하는(Bypass) 사건이었다면, 십자가는 재앙이 예수라는 피뢰침에 꽂혀 소멸(Extinction)된 사건입니다. 그분이 심판의 쓴 잔을 남김없이 비우셨기에 우리에게 건네진 잔에는 더 이상 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주하는 성만찬의 식탁은 유월절을 넘어섭니다. 딱딱한 고난의 떡은 생명의 떡이 되었고, 두려움의 밤은 감사의 아침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의 모든 비명을 당신의 몸으로 받아내셨기에 우리는 이제 그 식탁을 감사(Eucharist)라 부릅니다. 이 얇고 딱딱한 빵을 떼며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졌으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 치러진 사랑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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