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4장: 낮아지신 하나님과 할례
출애굽기 4장: 낮아지신 하나님과 할례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렇게 해서 이적을 보여 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숙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십보라가 부싯돌을 가지고 와서, 자기 아들의 포피를 잘라 모세의 발에 대고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그들을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굽어살피시고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셨다는 말을 듣고,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출애굽기 4:5, 24-25, 31 부분 발췌, 새번역)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의 소명은 이제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넘어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이적을 쥐여주십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이 나병에 걸렸다 낫습니다. 사람들은 이 불가해한 사건을 보며 신의 개입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이적들은 하나님의 힘자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눈높이로 자신을 구겨 넣으신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하)'입니다. 마치 부모가 옹알이하는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혀 짧은 소리를 내듯,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저잣거리의 마술 같은 방식으로라도 전하려 하십니다. 이적은 능력의 과시가 아니라, 어떻게든 백성을 설득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운 동행 뒤에는 서늘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24절). 문맥상 너무나 뜬금없어 보이는 이 구절은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방금 전까지 이집트로 가라고 등 떠미신 하나님이 왜 길 위에서 그를 죽이려 하시는가? 이 난해함 속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처절한 역사적 고뇌가 서려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바벨론 강가에서 울던 포로기의 저자들에게 망국의 원인은 힘의 부재가 아니라 언약의 파기였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조차 언약의 표징이 없으면 죽을 수 있다." 저자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율법과 할례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죽고 사는 생명줄임을 뼛속 깊이 새겨놓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위기의 순간, 모세를 구한 것은 이방 여인 십보라였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성기)에 대며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이라 선언합니다. 그녀가 행한 할례는 장차 이집트에 내릴 열 번째 재앙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과 같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그 집주인이 이스라엘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발렸느냐, 발리지 않았느냐만을 볼 뿐입니다. 십보라가 보여준 것은 혈통을 넘어선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죽음은 오직 피의 언약을 통해서만 넘어갑니다(Pass-over).
할례는 남성의 생명력이 솟아나는 근원을 잘라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나의 힘으로는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라는 처절한 자기 부인이자 무력함의 고백입니다. 40세의 모세가 자신의 능력과 열정으로 민족을 구하려 했을 때 그는 실패했습니다. 이제 80세가 되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는 노인이 된 지금, 하나님은 그에게 마지막 남은 육체의 신뢰마저 끊어내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탁월한 능력이나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철저한 순종과 언약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24절의 그 기이한 습격은 모세 안에 남아 있던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지팡이만을 의지하게 하려는 거룩한 통과의례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의 난해한 구절 앞에서 낭패감을 느끼며 씨름합니다. 그러나 그 치열한 해석의 몸부림 끝에 우리가 만나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어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의 힘이 끝나는 곳, 내가 완전히 무력해져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을 의지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참된 출애굽은 시작됩니다. 할례받은 마음, 곧 무력함의 고백이야말로 그 옛날 이스라엘의, 그리고 오늘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