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강은 어디까지 흐르는가 (아모스 5장)
마르지 않는 강은 어디까지 흐르는가
아모스 5장 묵상
4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15 "행여 주 만군의 하나님이 남아 있는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르니,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 24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1.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생활 신앙으로의 초대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복잡한 신학이나 화려한 제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한 명령,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찾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사람답게,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것, 곧 '생활 신앙'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법정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더욱 정교하고 호화로운 종교 의식으로 가리려 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무너진 공의와 정의는 성전의 번제물과 찬양 소리로 덮였습니다.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 질타하신 위선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역겹다고 하십니다. 삶이 분리된 예배, 정의가 실종된 찬양은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그들의 삶의 한복판을 흐르기를 원하셨습니다.
2. 반복되는 실패: 인류의 변하지 않는 답안지
아모스의 고발은 특정 시대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백 년이 흘러 예수께서는 안식일 법과 정결법이라는 거룩한 종교적 명분을 위해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했던 신앙인들을 향해 똑같은 질책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천 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 역시 삶의 정의를 실천하기보다 종교적 열심과 자기만족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을 대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역사는 진보가 아니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 사인파'와 같다는 통찰처럼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실패하는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인류의 보편적 본성일지 모릅니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도, 예수 시대의 유대인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자기 인식이야말로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3. 희망의 실마리: '남은 자'는 누구인가?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 아모스는 한 줄기 빛을 던집니다. "행여 주 만군의 하나님이 남아 있는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르니"(15절). 전통적으로 '남은 자'는 심판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구원받는 소수의 무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이 개념을 더 깊고 넓게 보도록 초대합니다. 과연 남은 자는 전체의 부분일 뿐일까요?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극소수에게만 제한된다면, 온 세상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우주적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피조물의 절대다수를 영원히 포기하는 것을 최종적인 결론으로 삼으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대담한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어쩌면 '남은 자'는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 안에서 결국 구원으로 초대될 '전체의 전체'를 가리키는 희망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요?
4. 마르지 않는 강의 목적지: 만인을 향한 희망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는 명령은 이제 새로운 깊이를 얻습니다. 이 강은 단순히 악인을 심판하여 쓸어버리는 진노의 급류가 아니라, 온 세상을 적시고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생명수, 곧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강입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확증된 그 사랑의 강입니다. 이 강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의 죄악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고 교리적으로 선언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심판의 가능성을 경고하며, 우리는 그 경고 앞에서 겸손히 옷깃을 여며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칼 바르트의 신학적 겸손을 본받아 하나님의 계시된 사랑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을 향한 구원을 간절히 희망할 수는 있습니다. 이 위대한 희망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재정의됩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만의 방주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온 세상을 위해 성취하신 구원의 소식을 미리 맛보고 세상에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공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공의와 정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마르지 않는 그 강이 온 세상을 덮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그 강물을 흘려보낼 준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