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 거리: 신적 섬김을 받는 은혜의 공간 (요한복음 21장)
적정 거리: 신적 섬김을 받는 은혜의 공간
요한복음 21장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19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1. 경외로 확보된 '적정 거리'
요한복음 21장은 실패한 제자들과 부활하신 주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보여준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는 따뜻한 초대 앞에서 제자들은 감히 "누구십니까?" 묻지 못한다. 이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어색함이 아니다. 십자가 앞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부끄러움, 그럼에도 다시 찾아와주신 주님에 대한 미안함과 반가움, 그리고 압도적인 현존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이 뒤섞인 성숙한 침묵이다. 십자가 이전,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은 주님과의 '밀착'을 자신했다.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는 그의 호기는 인간적 열정의 정점이었지만, 그 밀착의 관계 속에서 그는 진정으로 주님을 보지 못했다. 너무 가까웠기에, 자신의 열정에 눈이 멀었기에, 그는 주님을 볼 수 없었다. 이제 실패의 잿더미 위에서 그들은 비로소 주님과의 '적정 거리'를 배운다. 이 거리는 소외가 아닌 경외의 공간이며, 관계의 새로운 시작이다.
2. '취함'의 에덴에서 '받음'의 갈릴리로
이 '적정 거리'가 만들어낸 공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권의 전복이다. 창조의 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거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취했다'(taking). 자신의 행위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친히 숯불을 피워 차려주신 아침을 그저 '받는다'(receiving). 이는 에덴의 비극을 역전시키는 구원의 장면이다. 더 이상 내가 무언가를 쟁취하여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주님의 섬김과 은혜를 온전히 수용하는 공간, 즉 회복된 창조의 토브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숯불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우신 숯불 앞에서 그분의 섬김을 받는다. 이것은 제자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3. 두 가지 앎, 두 가지 따름
이러한 주권의 전복은 베드로의 소명에서 명확해진다. 예수님은 '젊은 너'와 '늙은 너'를 대조한다. '젊은 베드로'는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의 앎은 자기 확신에 찬 앎이었고, 그의 따름은 자기 열정에 기반한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와 부인이었다. 이제 '늙은 베드로'는 남들이 그의 팔을 벌리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는 수동성으로의 초대이며, 자기 의지를 온전히 내어맡기라는 부르심이다. '늙은 베드로'의 앎은 실패를 통해 얻어진 관계적 앎이며, 그의 따름은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의 이끄심에 온전히 의탁하는 따름이다. "나를 따라라"는 동일한 명령이 이제 전혀 다른 차원에서 들려온다. 자기 힘으로 따르려 했던 '젊은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맡긴 '늙은 베드로'는 비로소 올바르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적정 거리에서 '신적 섬김'을 받으며 살아가는 자의 새로운 실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