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라는 울타리, 체험이라는 문 (요 9장)

지식이라는 울타리, 체험이라는 문

요한복음 9장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9:3, 새번역)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나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는데,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25, 새번역)

예수께서 그를 만나셨을 때에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이십니까? 내가 그를 믿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가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요한복음 9:35-38, 새번역)


1. 한 가지 아는 것, 구도자의 정직한 출발점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는 당대의 상식과 규범 안에서 '죄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다고 정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십니다. 그의 눈이 열리는 기적, 그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압도적인 체험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그는 놀랍도록 정직하고 담백한 고백을 합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나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는데,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려한 신학적 언어로 포장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구도자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명백한 진실 위에서 이제 막 탐험을 시작하는 첫걸음과 같습니다. 그의 신앙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겸손이 있었고, 아는 한 가지 진실은 목숨 걸고 증언할 용기가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처럼 거창한 구호라기보다는 내 삶을 만지신 예수의 흔적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2. 모든 것을 아는 자들의 감옥, 지식의 울타리

반면에 모세의 후예임을 자부하며 당대 최고의 지성과 신앙을 가졌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눈앞의 기적을 탐구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이미 쳐놓은 [[율법과 규범]], 상식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예수를 끌어들여 교정하고 심판하려 합니다. 그들에게 [[신학적 지식]]과 [[종교적 전통]]은 하나님을 만나는 창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아프게 말을 걸어옵니다. 오랜 신앙생활, 수없이 들은 설교, 산더미처럼 쌓인 신학 서적들이 오히려 예수를 있는 그대로 만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만 해'라는 나만의 규정이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지금 내 삶에 찾아오셔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막는 영적 백내장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이 깊이 믿는 것을 방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9장이 폭로하는 영적 비극입니다.

3. 터져 나온 고백, 은혜가 이성을 넘어설 때

예수님은 출교당한 그를 다시 찾아가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이 계시 앞에서 남자가 터뜨린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의 최종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성과 이해를 뛰어넘는 압도적인 은혜 앞에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응답이었습니다. 이것이 한때 맹인이었고 죄인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그를 죄인이라 규정했던 이들로부터 출교까지 당한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그를 존재론적으로 새롭게 규정하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신앙생활의 묘미]]입니다. 나의 노력과 이해로 믿음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계시 앞에 내 존재 전체로 반응하는 것.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 진리를 향해 열려있는 가난한 심령에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는 기적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바리새인의 완고한 질문을 멈추고, 요한복음 9장의 주인공처럼 그저 엎드릴 뿐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분 앞에 마음과 뜻과 온몸을 엎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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