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빵, 하늘의 생명 (요한복음 6장)
육신의 빵, 하늘의 생명
요한복음 6장 묵상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26,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35, 새번역)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 (요한복음 6:44, 새번역)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68, 새번역)
1.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눈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들은 열광하며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손끝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을 '보았지만(見)', 그 일이 가리키는 예수의 정체를 '알아보지(識)'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썩을 양식]]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열망은 이 땅의 왕국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기적의 한복판에 서서도, 생명의 근원이신 분 앞에서 또 다른 표징을 구하는(30절) 어리석음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를 보았으나, 영의 눈은 감겨 있어 그가 누구신지, 어디로부터 온 [[생명의 빵]]이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2. '아무도 없음'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은혜
무리와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인간의 불가능성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65절) 이 말씀은 특정인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에게는 0.001%도 없음을 선포하는 가장 철저한 [[은혜의 선언]]입니다. 우리의 의지, 깨달음, 노력으로는 아무도 예수께 이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 즉 '[[아무도 없음]]'(οὐδείς)의 절망적인 지점에서 하나님의 전능한 이끄심이 시작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44절). 이 '이끄심'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람처럼 불어오는 [[성령의 역사]]가 닫힌 우리의 눈을 열고 굳은 마음을 움직여 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절망이 아닌 궁극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연약한 손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가장 안전한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3. 오늘의 오병이어를 먹는다는 것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예수님의 말씀은 절정으로 치닫고, 무리의 수군거림은 노골적인 거부로 바뀝니다. "이 말씀은 너무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0절)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갑니다. 육신의 빵은 쉽게 삼켰지만, 생명의 살과 피는 도저히 삼킬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만찬]]의 신비를 마주합니다. 성찬의 떡과 잔은 바로 '[[오늘의 오병이어]]'입니다. 2000년 전 무리가 먹고도 깨닫지 못했던 그 [[생명의 빵]]을, 오늘날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성찬을 통해 맛보고 마시며 우리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화체설이나 기념설 같은 교리 논쟁을 넘어 그리스도의 생명에 실제로 참여하는 성육신적 사건입니다.
모두가 떠나간 텅 빈 자리,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훗날 예수를 부인할 그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이 고백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마치 아기의 옹알이가 부모에게는 세상 가장 큰 기쁨이듯, 성령의 이끄심에 대한 우리의 이 서툰 응답은 하나님께 둘도 없는 [[관계적 기쁨]]이 됩니다.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의 은혜가 맺은 가장 아름다운 열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