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영원한 관계 속으로의 초대

영원한 관계 속으로의 초대

요한복음 17장


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21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26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1. '멸망의 자식'이라는 거울

예수님의 기도에 등장하는 멸망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타인을 정죄하는 근거로 사용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먼저 다가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들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논리로 그는 멸망의 대상입니다. 참된 성도는 자신의 의로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자신이 양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염소일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바로 그 멸망의 자식일 수 있다는 정직한 자기 성찰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무한한 품을 헤아리기 시작합니다. 심판의 잣대를 내려놓을 때 구원의 문은 넓어집니다.

2. 창세 전부터 시작된 관계 속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창세 전부터 시작된 영원한 사랑의 교제(토브) 속으로의 초대입니다. 이 신비로운 하나 됨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속 비유의 양들은 자신이 언제 주님을 섬겼는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섬김은 계산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변화된 존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열매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성취하여 하나가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시작된 그 사랑의 관계 안으로 부름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3. 하나님의 기억, 우리의 영광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보기를 간구합니다. 그 영광은 십자가에서 가장 밝게 빛났던 자기 비움과 사랑입니다. 동시에 그 영광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해석을 통해 발견됩니다. 우리가 기억조차 못 하는 작은 섬김의 순간들을 주님께서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해주실 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비로소 영광스러운 사건이 됩니다(마 25장 양들의 고백과 예수님의 해석). 우리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때로 왜곡됩니다. 평생의 신앙고백마저 치매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잊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억에는 쇠함이나 오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잊고 하나님을 잊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이미 알렸고, 앞으로도 계속 알리실 것입니다(26절). 이 멈추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 표명이야말로 우리네 현존재가 희망할 수 있는 궁극적인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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