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신비, 불신의 책임 (요 12장)

믿음의 신비, 불신의 책임

요한복음 12장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그처럼 많은 표징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12:37, 새번역)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2:40, 새번역)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복음 12:48, 새번역)


1. 불신(不信) 속에 숨겨진 희망의 공간

요한복음의 편집자는 예수의 수많은 표징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의 예언(40절)을 가져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 이 구절은 인간의 믿음과 불신이라는 현상 배후에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얼핏 인간을 무력한 존재로 만드는 숙명론처럼 들릴 수 있지만, 오히려 역설적인 희망의 공간이 열립니다.

나의 믿음이 전적으로 나의 결단이나 지성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결과라면, 믿는 우리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랑이 아닌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동시에 아직 믿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섣부른 정죄의 시선을 거두게 됩니다. 그들의 불신 속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인정은 우리를 판단의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과 긍휼의 자리로 인도하는 [[믿음의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2. 편집자의 고뇌, 진리 앞의 정직함

그런데 편집자는 곧이어 40절의 선언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한 예수의 말씀(48절)을 기록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아니라, 개인이 예수의 '말'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인간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 두 구절 중 어느 것을 붙잡아야 할까요?

이것은 해결해야 할 논리적 모순이라기보다, 진리 앞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편집자의 고뇌]]이자 정직함의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이율배반(Antinomy)]]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긴장을 편집자는 억지로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두 진리를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병치(竝置)합니다. 이는 그의 신학적 미숙함이라기보다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재단할 수 없다는 깊은 겸손의 표현일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서 양쪽의 진리를 모두 붙드는 것과 같습니다.

3. 칼날 위에서 하나님을 부르다

결국 우리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아야" 합니다. 이 신비로운 긴장은 우리를 혼란이 아닌 거룩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게 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 2:12-13)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미 이 칼날 위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40절)은 구원의 시작과 끝이 오직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게 하며, 우리를 경배와 감사의 자리로 이끕니다. 동시에 인간의 책임(48절)은 매 순간 말씀에 인격적으로 응답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내라는 준엄한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이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진리는 서로를 파괴하는 대신 서로를 붙들며 우리 신앙의 역동적인 균형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기댈 때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인간의 책임 앞에 설 때 우리는 방종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분투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 아슬아슬한 칼날 위에서 우리의 이성은 길을 잃지만,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고백합니다. 모든 이해의 끝에서 남는 것은 오직 [[선하신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의 이름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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