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눈물, 죽음의 모의(요한복음 11장)

생명의 눈물, 죽음의 모의

요한복음 11장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요한복음 11:35, 새번역)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7-48, 새번역)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요한복음 11:49-50, 새번역)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요한복음 11:53, 새번역)


1. 하나님의 가장 인간적인 얼굴

요한복음의 저자는 왜 하필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순간, 가장 신적인 권능을 드러내는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의 눈물을 배치했을까요? 구름을 타고 다니며 번개를 내리치는 초월적인 메시아의 모습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성육신]]의 가장 깊은 신비를 마주합니다. 편집자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강력한 신성이 가장 연약한 인간성을 통해 드러나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으로 깨어져 버린 세상과, 그 안에서 신음하는 인간의 고통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공감]]의 눈물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류가 마주한 죽음의 비극 앞에,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하는 '회복된 인성'이 흘리는 생명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 속에서 우리는 냉담한 심판자 대신 우리와 함께 아파하는 [[하나님의 인간성]],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발견합니다.

2. 생명을 낳는 눈물, 죽음을 부르는 두려움

본문은 예수의 눈물과 대제사장들의 살인 모의를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될까요? 그것은 [[생명]]과 [[죽음]]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현실 앞에서 눈물 흘리십니다. 이 눈물 안에는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개인적 슬픔(ἐδάκρυσεν)과 죽음의 권세 그 자체를 향한 거룩한 분노와 비통함(ἐνεβριμήσατο)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에 대한 패배 선언이 아니라 생명을 되찾기 위한 전쟁 선포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눈물은 결국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단절된 관계 회복, 곧 부활의 상징입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생명의 기적 앞에서 [[두려움]]에 떱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우리의 땅과 민족', 즉 자신들의 [[종교 권력]]과 기득권을 잃을까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은 생명의 역사를 보고도 그것을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문제로 인식합니다. 생명을 향한 예수의 눈물이 소생과 환생을 낳았다면, 권력 유지 앞에서의 그들의 두려움은 무고한 자를 죽이려는 살인 모의를 낳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생명을 낳고, 두려움은 죽음을 잉태합니다.

3. 가장 타락한 논리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

가야바의 제안은 타락한 [[세상의 지혜]]가 어떤 모습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 이 말은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매우 합리적이고 정치적인 논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한 생명의 존엄성을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명분 아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비정함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설]]이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가장 냉소적이고 폭력적인 계산을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가장 타락한 논리를 들어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십니다.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이 말을 했지만, 편집자 요한은 그가 자신도 모르게 '예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고 해석합니다. 인간의 가장 악한 계획조차도 결국 더 크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절망과 세상의 모순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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