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은 보험이 아니다 (요 20:22-30)
오늘 설교자는 요한복음 10:22-30을 "빼앗긴 것을 되찾음으로서 영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본문의 시간 배경이 수전절, 그러니까 마카비가 성전을 되찾아 수리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여서 설교자는 제목을 빼앗긴 것을 되찾음이라고 했다. 설교자는 1세기 이스라엘은 경제적 양극단의 사회라고 했다. 게다가 요한 공동체는 안 그래도 가난한데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손가락질도 받아야 하는 설상가상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편집자)는 생뚱맞게 영생을 말한다. 먹고 살기 팍팍한데 영생을 말하는 편집자는 제정신인가. 편집자는 미래 보장성 보험으로서 영생을 말하지 못한다. 편집자는 미래에 영생을 보장 받을테니 지금 적립, 투자하라고 선동할 수 없다. 시쳇말로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뭘 투자한단 말인가. 편집자의 절박한 궁색함은 그의 사유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관계가 영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인 예수가 목자가 되시어 양들에게 영생을 준다는 생각, 이것이 겉보기엔 굴비 하나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갈 먹고 굴비 한 번 쳐다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영생을 현재화 하는 편집자의 내면 정신의 지혜와 영성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생각해보자. 사는 것보다 죽고 싶은 이들에게 영생을 말하는 요한복음 편집자의 매달아 놓은 굴비처럼 보이는 현찰 영생이 당시 요한 공동체에게 위로가 얼마나 됐을까만, 보장성 보험으로서 영생을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붙잡은 영생의 현재화를 그 누구도 다시는 빼앗을 수 없다. 빼앗길 수 없다. 빼앗지 말아달라는 청원이다. 이걸 하나님이 모른 체 하실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