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저주의 칼이 하나님의 배를 찌를 수 있을까

어느 날 저녁, 그들은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자주 여기 오시나요?" 바룩이 그에게 물었다. 엘리아십은 말없이 무덤 입구에 있는 두 개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올바르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했고,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했고, 안식일마다 제사를 드렸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받은 보상이 무엇입니까?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친구이자 도우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시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시라고 얼마나 자주 쓰여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그분의 도움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데려가셨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나는 경건한 자의 모든 의무를 다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받은 보상입니까?"
이 말을 한 후 그는 옷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 펼치고 한 구절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선지자 말라기가 청중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우리가 그의 명령을 지키며...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리고 이제 이 아이마저 죽었을 때,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네, 저는 속으로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비방만 한 것이 아니라 저주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분노에 휩싸여 외쳤다. 
"당신은 내가 받아 마땅한 것, 내 보상을 빼앗았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저주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를 마차 사고로 잃은 바룩이 아내의 무덤 곁에서 아내와 아이까지 잃은 엘리아십을 우연히 만나서 그가 내뱉는 서슬퍼런 증오의 말을 듣는 장면이다. 천재라 불리는 어느 노 신학자가 그랬다. 진짜배기 악은 나름 아름다움이 있다고. 미악인 거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저주하든지 찬양하든지 하나만 하라고. 그런 사람만 변혁 가능성이 있다고. 뭐랄까 김훈 선생 문체를 오마주 하고 싶은데 마음은 용인데 그려놓고 보면 똥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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