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코흐의 욥기 이해
후기: 나의 욥기 이해
욥 이야기의 형성사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부터(처음으로 프랑스인 Richard Simon, 1678; H.P. Müller, Das Hiobproblem, 23) 해석의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 길은, 욥기의 생성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각 단계의 특정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폰 라트는 그의 짧은 욥기 해석에서 이 길을 따랐다(G. v. Rad, Weisheit in Israel, 267-292). 두 번째 길은 욥기의 최종 형태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경우 역사-비평적 연구의 통찰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종 편집자가 만든 최종 형태가 중요하다(J. Ebach, Streiten mit Gott).
나는 이 책에서 욥기의 내용을 새롭게 풀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욥기가 만들어진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첫 번째 길을 선택했다. 이 방식을 통해 욥기가 담고 있는 풍부하고 깊이 있는 메시지가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하나의 의도로 만들어진 단일한 텍스트로 욥기를 본다면, 자칫 텍스트의 풍부함을 놓치고 피상적인 이해에 그칠 수도 있다.
*쉽게 가자. 하나의 의도를 지닌 단일 텍스트로는 썰을 못 푼다 이거 아니냐. 한 개보단 두 개지, 암만. 근디 이분이 다다익선을 어떻게 알았쓰까. 그나저나 정치권 쓰까요정님 요즘 뭐하시나 모르겠네. ^^
그의 고발에서 묘사되는 왜곡된 하나님의 모습들, 곧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는 하나님, 나를 괴롭히는 하나님, 인간의 삶을 자신의 변덕의 노리개로 만드는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이런 거짓되고 비성경적인 공포 이미지는 욥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욥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나님께 맞서는 반역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고발은 하나님께 다시 받아들여지고 그분께 안기고 싶은 깊은 갈망의 표현이다.
*처음 봤을 때도 좋았는데 다시 봐도 좋다. 자꾸 봐도 좋으면 난 나태주 할배(족보 따지면 뭐라도 연결고리가 있겠지) 좇아 시를 쓰련다. ^^ 흔히 성경적 비성경적이라고 하면서, 하필이면 성경적이라 할 때 공포 이미지 카드를 내밀 때가 잦다. 욥기를 은혜 받으며 읽고 나서 카드 잘못 내밀면 욥도 하나님도 당황스럽기 그지 없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어떨 때 비성경적이라고 하는지 정말 정말 깊이 새겨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