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부활 신앙 사이의 시간 (마가 16:9-14)

마가복음 16:9-14

부활과 부활 신앙 사이의 시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아니, 믿든 믿지 않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선포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부활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 바울이, 그리고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부활하셨다”는 자신의 신앙고백 때문에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신앙의 전사요 투사처럼 그렇게 의연하게 그들의 신앙고백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신앙고백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질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유별나고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가지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던 사람들이 동료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을 봤다고 하자, 그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했는데,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슬퍼하며 울고 있었을 뿐입니다. 두 번째로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뵙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자,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로 열한 제자가 식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완고한 그들의 마음을 꾸짖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은, 특히 예수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 답답하십니까?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의 모습이나 우리의 모습이나 그나물에 그밥이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천하에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기 전 베다니에서 친구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것을 제자들은 이미 보았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 일과 저 일을 서로 맞춰 추측이라도 해볼만한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합니다. 왜 그들은 믿지 못했을까요?


10절입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제자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어버린 듯한 그런 슬픔과 울분이 제자들의 마음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우리도 가끔 이럴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힘마저도 없을 때 말입니다. 그런 상태가 점점 지속되어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 말입니다. 제자들은 꿈이 많았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권력을 쥐시면 자기들도 한 주먹씩은 휘두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변방 갈릴리 출신이 권력의 심장부 예루살렘에서 헛기침 소리 내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꿈과 희망을 주군 예수께 걸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주군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랬으니 제자들의 눈앞은 캄캄했습니다. 제자들은 어둠의 시간, 자기들의 꿈과 기대와 희망이 모두 무너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자기들의 꿈, 욕심, 기대, 희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나는 이제 잡혀서 고난 받고 죽는다’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는데도, 그 말씀이 그들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의 꿈과 욕망이 허망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말씀, 곧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들을 수도 들리지도 않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마음의 귀가 들리지 않던 “이 시간”을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도 이런 시간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은 밑바닥을 기는 듯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도리질 하며 그런 생각을 지워내도 ‘하나님의 비존재’가 코앞에 버티고 서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욥의 아내의 말을 내가 듣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빠지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되는 시간을 살았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의 출생은 특별했습니다. 아슬아슬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40년 동안 애굽 왕실의 교육을 받아 엘리트가 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우리 민족’, ‘내 동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40년 동안 갈고 닦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모세는 파라오의 칼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모세는 거기에서 무려 40년 동안 ‘하나님이 안 보이고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시간’을 보냅니다. 모세의 나이 40세부터 80세까지의 시간이 본문의 제자들이 보내고 있는 시간입니다. 소싯적 품었던 꿈조차 가물가물하고, 희망도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앞으로 살아갈 길만 막막하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명줄을 이어가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시간이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이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40-50일간 겪었던 시간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이런 깊은 수렁의 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없겠습니까? 본문은 이런 방법을 제시합니다. 14절입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방법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구원의 손길이요 우리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지다 못해 ‘하나님조차 없다고 생각될 때’, 기도할 힘마저 없을 때 그런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실망과 좌절의 수렁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절대 고독’을 맛보는 시간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강림하기 전까지 절대 고독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말씀하시던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40년을 ‘절대 고독의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얼마 전 이어령 선생은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이미 50년 전에 ‘절대자’를 찾아 헤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몇 해 전 일본 교토에 가서 혼자 밥해먹으면서 절대 고독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빵집에서 따뜻한 빵을 품고 집에 돌아와도, 밤이 되면 자기가 살던 방이 마치 정적만 감싸는 사원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홀로 고독 속에서 발가벗고 있을 때 평생 처음으로 ‘바깥에서 오는 힘’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어령 선생의 교토 생활은 ‘절대 고독’의 시간입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은 아침이 아니라 밤의 시간입니다. 여성분들의 예를 들어 말씀 드리면, 화장을 지우는 시간, 남이 모르는 나의 민낯을 봐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꿈도 희망도 다 접고 살아갈 때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40일 만에 지나갔고, 모세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40년간 보냈고, 이어령 선생은 50년을 고독으로 빠져들다가 교토에서 1년 동안 절대 고독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그분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내 꿈과 희망뿐 아니라 나 자신이 다 허물어지는 시간’이긴 하지만, 그 시간은 이어령 선생이 경험한 것처럼 ‘바깥에서 오는 힘’을 경험하기 직전의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바깥에서 그들 가운데로 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습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는 시간이 없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없습니다. 화장을 지워야만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쌓아 놓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내 구주’라는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된장도 고추장도 김치도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은 고독으로 빠져들어가다가 절대 고독을 지나는 기간입니다. 내가 다 허물어져 내리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고독의 시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시간을 직접 해결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당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 때 모든 것이 새롭게 세워지고 정립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그 주님을 목숨을 버리면서 전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나타나신 그것 때문에 그 후 4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성경이 거짓말 책이 아니라면,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은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문제입니다. 여전히 사람의 입술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요, 부활하셨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 일은 주님의 몫이요, 당연히 주님이 처리하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흐르는 강물처럼 전승합니다. 그 물결에 우리가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주님, 모세도 제자들도 주님의 죽음의 시간을 보냈는데, 우리인들 그 시간을 피할 길이 있겠습니까. 욕심, 꿈, 욕망, 교만,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고 한들,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다짐인지를 우리는 일상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공허한 인생을 찾아오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그 옛날 모세에게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큰 강물 아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그 위에 우리 신앙의 뿌리를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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