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연, 기독교 역사를 무시한 토착화 이론은 원시화를 의미, 기독교사상 7 (5)
전경연은 1963년 3월에 <신세계>에 토착화에 대한 글을 썼다. 이에 대해 유동식은 <기독교 사상> 4월호에서 전경연의 글을 논박한다. 전경연은 <기독교 사상> 5월호에 유동식의 비판에 답한다. 아래는 기독교 사상 5월호에 실린 전경연의 비평이다.
유동식의 토착화 제안에 대한 전경연의 비평
전경연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의 문화를 구분한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문화가 그리스도교와 떼려야 뗄 수 없으나 그리스도교 문화가 그리스도교가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와 그 문화는 다시 말해서 신앙과 문화다. 즉 신앙(신앙고백)이 문제가 되어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지, 문화가 앞서 가고 신앙이 뒤따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문화와 다른 실체다. 문화의 동기와 신앙 고백의 동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경연은 서구 신학의 한국 토착화에 대한 유동식의 제안이 간과한 점이라고 평가한다.
유동식이 간과한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역사와 그 전통이다. 복음은 어느 민족과 그 지역에 들어가서 고백의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예를 들어 2차대전 동안 일본 그리스도교가 일본적 신학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 문제다. 토착화는 자칫하면 복음의 내용보다 선교지의 인종과 문화에 매몰될 수 있다. 1963년 당시 전경연은 100년 남짓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약 1,900년 동안의 서구 토양에서 다듬어진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전통을 좌지우지 하려거나 섣불리 극복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전경연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도 신앙의 토착화 문제는 재래 종교의 신앙 형태나 민족 특유의 예술 전통을 어떻게 살리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모든 소재들이 복음의 공격에 의하여 불살라지고 그 잿더미에서 새롭게 솟아나는 새싹이 어떤 것이겠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복음의 씨에서 자라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이 이 땅에서 새로운 성격 형성을 받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된 표현이 지금까지 없기 때문에 토착화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태동의 등장
전경연과 유동식이 논쟁하는 모습을 지켜본 한태동은 <기독교 사상> 7월호에서 토착화 신학이 시도한 유형을 나열한 후 한국에 토착화 하는 과정에서 생길 문제들을 예상한다. 특히 한국은 샤머니즘과 유불선이 대세인데, 유교나 불교에 대해서는 연구 검토한 사례가 있는데, 도교는 아직 안 보인다며 기독교가 도교와 얼마나 부드럽게 만날 수 있을지를 살핀다.
한태동은 서구 기독교의 이차원적 사고 방식이 도교에도 있으니 동이니 서니 하며 지역을 가리지 말고 문화의 구조와 형태를 논하자고 제안했다. 한태동은 서구적 요소가 개입된 교리가 이차원적이라는 말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조는 살피지 않았다(살피나 마나 이차원일 것이라)고 하면서 여차하면 열고 나갈 뒷문을 열어 놓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나는 한국에서 최고의 토착화 사례는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이 아닐까 싶다. 이론이 어떻고 저떻고 구조가 다르니 비슷하니 갑론을박 하지 않는 삼박자보다 찰진 토착화가 또 있을까. 조용기 목사는 마치 몸이 기억하듯이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했고 재미도 많이 보셨다.
어쨌든 옛날 선생님들이 훨씬 재미나게 공부하고 토론하셨다. 그 와중에 실용적으로 실리를 챙긴 분도 계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