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신실함 (사 50:4-10)

4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10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사람은 본성처럼 어둠 친화적이다. 마침내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요 1장과 십자가 처형). 이사야는 어둠에 빠져 빛 없이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기억과 약속을 선포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하고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너의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한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은 곤고한 자를 도와주시는 분, 그런 자를 돕기 위해서라면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분, 때리는 자에게 등을 대시는 분, 수염 뽑는 자들에게 뺨을 내주시는 분, 침 뱉으며 모욕을 당할 때 얼굴을 가리지 않는 분, 온갖 치욕을 겪는데도 당신 얼굴을 부싯돌(차돌)처럼 굳게 하여 견뎌내시는 분, 그렇게 꿋꿋이 견뎌 마침내 흑암에 빠져 빛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분이다(4-7).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본래 관계를 드러낸다(창 1장과 요 17장).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새긴 약속에 신실하다. 하나님은 어둠에 빠져 빛 없이 사는 자 곁에서 당신 이름을 그에게 알려주시고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흑암 중에 행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이요,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월이 빨라서가 아닙니다. 수 천 년이 지났음에도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상황과 내용이 오늘날도 여전히 그대로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우리는 이 말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던 세대가 있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역사가 말해주는 실상은 사랑과 용납과 배려의 열매보다는 피가 더 많았습니다. 상대를 억압하고 짓눌러 밟는 역사가 더 많았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 서로 화평을 이루기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수십 갈래로 찢어놓는 결정을 더 많이 했던 것이 사람의 역사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10절 말씀처럼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한 바대로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빛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마음은 무모하게 차라리 빛을 없애버리자고 결정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마가복음 12장, 누가복음 20장은 고발합니다. 포도원 일꾼들이 마침내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비유는 빛을 없애버리려는 사람의 악한 마음을 대변합니다. 사람이 흑암 중에 있다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했고 실제 결행한 일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이 있다고 합니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고 하면서 빛이 비취기에 그림자가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자, 즉 어둠도 빛 때문에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어둠에 속하기로 결정한 것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 때문에 생겼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빛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버렸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하기로 결정한 책임을 빛에게 떠넘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빛과 어둠에 대한 진실입니다. 

사람은 빛이 환하게 비취는데도 눈 감아 버리고 흑암에로 빠지는 습성을 본성처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측면에서 빛과 어둠을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에 눈 감아 버리고 고개를 돌리는 데서 그리스도인의 어두운 면이 생기고 맙니다. 얼마 전 우리는 전직 대통령의 구속을 지켜봤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 모습을 보고 ‘000 장로님, 이제는 돈을 믿지 마시고 당신이 믿는다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장로이자 전직 대통령이 뇌물을 받아 구속되는 상황을 우리나라만 보는 게 아니라 전 세계가 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권력과 돈이 내게도 주어지면 나 또한 저런 꼴을 보이지 않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제 맘대로 휘두를 돈과 권력이 없어서 나는 지금 전직 대통령의 구속을 남 일처럼 혀를 차며 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섬뜩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고백하는 사람인데 다른 대상에게 신앙을 고백해버리면 더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크든 작든 사소하든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긴 적이 없는가를 따져본다면, 우리는 여러 번 하나님의 구속영장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에게 돈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기자의 말은 허울뿐인 그리스도인 말고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사야의 권면

본문은 ‘하나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주님의 종이라 불리는 이는 흑암에 빠져 빛이 없는 것처럼 사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b)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더냐? 그렇다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생각하라는 권면입니다. 논어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 이 말은 지도자는 지도자 구실을 잘 하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의 구실을 잘 해야 하고, 부모는 부모 노릇 잘 하고 자녀는 자녀의 도리를 잘 하면, 그 관계가 부드럽고 소통이 잘 된다는 뜻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더냐? 그렇다면 너희는 실제로 하나님을 어머니요 아버지로 생각하라는 주문입니다. 

빛이 어둠을 만드는 게 아니라 빛을 보고도 우리가 눈을 감아서 어둠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빛에 제대로 응답할 때 군군신신 부부자자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실 때 우리가 눈을 감아버리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이 군군신신 부부자자 하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부드럽고 시원하게 소통하며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서 벗어나서 빛 가운데 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뢰하라

이사야의 권면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라’는 부분입니다. 본문은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하면 될 것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여호와 이레(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야훼 체바오트) 등이 있습니다. 신약에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마 1:23)는 말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과 능력을 그분의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본문에도 나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이름은 명사처럼 정적인 모습이 아닌 동적인 형태로 소개됩니다. 본문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는 대목은 4절부터 7절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여호와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곤고한 자를 도와주시는 분, 그런 자를 돕기 위해서라면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분, 때리는 자에게 등을 대시는 분, 수염 뽑는 자들에게 뺨을 내주시는 분, 침 뱉으며 모욕을 당할 때 얼굴을 가리지 않는 분, 온갖 치욕을 겪는데도 당신 얼굴을 부싯돌(차돌)처럼 굳게 하여 견뎌내시는 분, 그렇게 꿋꿋이 견뎌 마침내 흑암에 빠져 빛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 이것이 본문이 알려주는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실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기억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부드럽게 소통했던 때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고 나서 지으신 것을 보며 정말 좋다고 하실 그 때를 잊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사람의 (모든 피조물) 본래 관계를 기억하십니다. 신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기억과 회복을 십자가를 앞두고 유언처럼 남기는 예수님의 기도의 형식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11, 24)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이 십자가를 통해 이끌어 올 사람들을 반드시 하나님과 당신의 그 원초적인 관계에 들어오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당신을 세상에 보내며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강청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소개한 본문은 우리에게 깊고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의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줍니다. 다른 이의 하나님이 아닌 너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바로 너에게도 여전히 너의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흑암 중에 빛 없이 사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멀리 있지 않다고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들을 도우시기에 그들을 정죄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공표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본문에 나온 하나님의 이름 대로 하나님의 기억과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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