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1장: 결렬의 순간에 터져 나온 거룩한 분노, 그리고 분별의 심연

출애굽기 11장: 결렬의 순간에 터져 나온 거룩한 분노, 그리고 분별의 심연

"이렇게 되면,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나에게 와서, 내 앞에 엎드려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백성은 모두 나가 주시오' 하고 사정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야, 내가 여기서 떠나겠습니다." 모세는 매우 화를 내면서, 바로 앞에서 나왔다. (출애굽기 11:8, 새번역)

장자의 죽음이라는 최후의 선언마저도 파라오의 굳은 마음을 뚫지 못했습니다. 아홉 번의 재앙으로 이집트 전역이 초토화되었음에도 그 나라는 기이할 정도로 굳건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가 타락한 인간 본성을 대표한다면, 인간의 굳은 마음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비이성적 맹목성을 지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전적 타락의 증거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마지막 재앙을 선언한 후 "매우 화를 내면서" 나왔습니다. 온유함의 대명사였던 모세가 왜 격노했을까요? 맥락 상, 이 장면은 앞선 10장 28-29절,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마라"는 파라오의 엄포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모세의 대답 직후에 위치합니다. 즉, 모세의 분노는 협상의 여지가 사라진 최종적 결렬의 순간에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자존심이 상해서 부리는 혈기가 아니라, 생명의 길을 끝내 거부하고 파멸을 선택하는 완악함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칼뱅의 말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멸시하는 태도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비통함을 자신의 감정으로 느끼는 자이기 때문입니다(아브라함 헤셸).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의 분노가 정당했다고 해서 우리의 분노가 늘 정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내해야 할 때와 거룩하게 분노해야 할 때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분별은 실존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바울이 마지막 때에 사랑만큼이나 분별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정이 합치될 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해지는 많은 일들이 냉정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투사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회심 전의 사울(바울)이 그랬듯이 확신에 찬 종교적 열심은 때로 타인을 억압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됩니다. 인간의 위대함이자 처절한 한계는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그 순간에 오히려 판단의 눈이 멀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니클라스 루만이 말한 '관찰의 관찰(Second-order Observation)', 즉 대상을 분별하는 것을 넘어 분별하고 있는 나 자신을 다시 분별하는 메타적 성찰이 요구됩니다. 나의 이 분노가 하나님의 공의에서 나온 것인지, 상처받은 자아에서 나온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기드온이 돌다리를 두드리듯 거듭 표징을 구했던 그 거룩한 회의와 주저함은 자기 의에 빠지지 않기 위한 영혼의 안전장치입니다.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거룩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난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철저히 자기가 부정되고 깨지는 시간을 통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된 분별은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때 자연스레 스며드는 성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확신이 아니라,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함 속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구하는 분별함을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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